일상 속 배려
나도 삶의 어느 길목에서 누군가에게는 진상이었을지 모른다. 항상 조심하려 애쓴다.
인터넷 정보가 많아지면서 일상 속 진상의 모습들도 많이 보인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진상들을 본 적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나서서 말리거나 술취한 나의 잔소리로 진상을 제압한 적도 있다.
진상짓을 하는 인간들의 공통점은 정작 자신은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꼴불견이고 못났다. 우리는 흔히 진상이라 하면 갑의 위치에서 을에게 함부로 하는 짓을 떠올린다. 식당, 가게 등 서비스업종에서 내가 돈을 내는 손님이랍시고 종업원이나 가게 주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진상짓이다.
가끔은 약간 다른 방향에서의 진상짓도 있다. 김연아씨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금메달을 딴 직후 절정의 인기에 올랐을 무렵, 진짜배기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있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연아를 보면 모른 척 해주자." 정말로 나의 스타를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다. 알아보는 이들 때문에 평소에 얼마나 피곤할까라는 그런 배려심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진짜배기 팬은 아니므로 만일 김연아씨를 길에서 봤다면 당장 아는 척했을 것 같다.)
상대가 유명인 또는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함부로 대하는 진상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 단지 식당에서 봤다는 이유로 돈을 내달라거나 하는 그런 진상짓. 이런 진상 장면은 글로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남은 것도 여럿 봤다.
진상의 또다른 특징이자 공통점은 배려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연아의 진짜배기 골수 팬들 자세와 완전 반대 방향인 것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술을 한 잔 걸친 후 또 술을 마시는 무모한 2차 대신, 근처 당구장을 찾아 게임비 내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당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자리에도 손님들이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낯이 익다 싶었는데 제대로 보니 그 유명한 이세돌씨다. 인공지능을 대상으로 바둑을 이긴 최후의 인간!
공교롭게도 나와 같이 당구를 치던 다른 세 명은 바둑을 나름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가서 싸인이라도 받지 그래?"
친구들의 배려 넘치는 답이 돌아왔다.
"가만 보니 이세돌씨도 술을 한 잔 마시고 우리처럼 동료들과 뒷풀이하러 온 듯한데, 그냥 모른 척하지 뭐. 당구 경기하는데서까지 아는 척하고 싸인 달라 그러면 좀 힘들지 않겠나?"
우리는 그날 밤, 그 유명한 바둑인과 비록 같이는 아니지만 옆에서 당구를 쳤다는 영광과 추억을 간직한 것으로 족하다. 당연히 사진조차 없다. 그냥 우리 맘 속에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바둑은 흰 돌, 까만 돌 정도만 구분하는 까막눈이지만 대신 당구는 내가 이세돌보다 더 잘 칠 것 같다는 치기 가득한 자랑도 나중에 다른 친구들에게 하곤 한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이런 친구들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는데는 서로가 비슷한 성격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종교도 다르고 정치관도 다르지만 식당 같은데서 종업원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어느 유명인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아는 척 별로 안 하는 (그래도 눈이 슬쩍슬쩍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배려심은 다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진상들은 아마 자기들끼리는 친할 텐데 그 우정이 얼마나 오래 가고 얼마나 깊은지는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