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는 이광수가 1920년대말 즉, 일제시대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한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최근에 읽었다. 1920년대니까 100년 전의 어투나 문구가 많이 살아 있는데다, 그 당시로서도 몇백년 전 상황을 그린 터라 단어나 표현이 생소한 대목이 좀 많다. 마치, 개신교 성경에 나오는 말투들과도 닮았다. (나는 개신교 신도 아니다. 공부 삼아 성경을 한번 읽었을 뿐이다.)
작가 이광수는 민주화 이전 시기에는 시인으로 유명했지만 역사가 좀 더 투명하게 연구되면서 일제부역자 즉, 친일파로 분류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이미 알고서 그 소설을 읽어 그런지 모르겠는데, 반역자 수양(세조)에 대해서도 (결국 왕이 되어 그런진 몰라도) 몇몇 대목에서 세조'대왕'이라 칭하는 부분은 좀 거슬린다. 반역을 통해 집권한 놈에게 굳이 극존칭을 쓸 필요는 없을텐데.
이미 알려진 역사라 많은 이들이 자세한 내막도 나름 알고 있어 그런진 몰라도, 그리고 100여년 전 시절 소설이 원래 그런 형식이라 그런진 몰라도 소설의 장면장면이 좀 이러저리 뛰어다니는 어색함은 있지만, 한 사람의 여러 좋은 점 나쁜 점을 균형있게 묘사한 점은 소설가로서 능력을 인정하게 만든다.
한명회가 수양 반란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역사 과목을 통해 이름을 들어본 정인지나 신숙주가 이런 놈들일줄은 생각도 못했다. 세종과 문종이 그렇게나 애지중지한 관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욕에 물들고 권력에 굴복하는 모습은 '너라면 안 그러겠냐?'를 넘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냐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특히 수양. 아무리 권력에 꽂혔기로서서니 조카를 그렇게 핍박하면서까지 권력에 오르고 싶었을까? 소설 중반까지 수양 본인의 입으로도, 주위 인물들에 의해서도 여러번 언급되는 바이기도 하지만, 중국 주나라 역사에 나오는 주공의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역사의 위인으로 남았을 수도 있을텐데 스스로 지 명성에 똥칠을 했다.
인류 역사에서 왕권을 찬탈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특히나 단종애사를 읽다가 보니 자연스레 전두환 무리와 12.12 사태가 떠올랐다. 수양과 한명회는 중국 반란 기록을 참고했을테도, 전두환 무리는 조선 역사와 단종애사를 참으로 깊이 참고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자연스레 든다. (박정희의 4.19는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직결해서 떠오르진 않았다. 수양, 박정희, 전두환은 뭐 똥 묻었냐 겨 묻었냐 차이 정도겠지만)
역사와 소설의 중심 인물들뿐만 아니라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에서도 인간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궁궐의 하급 경비원 정도지만 목숨을 걸고 반역을 알리려 애쓰다 결국 허망하게 그리고 참혹하게 죽어간 훌륭한 이들도 있고, 약간의 기회라도 신분 상승 목적으로 오로지 '나만 잘 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치달은 쥐새끼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도 나온다. (쥐야, 미안하다. 사람들이 나쁜 건 주로 너한테 비유하더라.)
단종애사는 나름 훌륭한 소설이지만 어쨌거나 소설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실제 역사를 참고하면서 봤다. 수양이야 나중에 후회를 좀 한 걸로 나오지만, 한명회 같은 놈들은 부귀영화 속에서 천수를 누리며 뒤졌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복을 비는 정도에 그치는 신이라면 참 한심한 신이 틀림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종교는 말한다.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지만, 진정 신이 있다면 나쁜 짓을 한 놈이 죽기 전에 자신이 한 짓의 곱절로 당하는 꼴을 보게 해야하지 않을까?
한명회가 나중에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모욕당했다 하지만 이미 죽어 썩어간 유기물 덩어리에 뭔 짓을 한들 그 나쁜 놈에게 무슨 해가 간다고.
단종애사는 지나간 일에 대한 묘사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한명회나 수양 뺨치는 놈들이 권좌에 앉아서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놈들은 각자의 신을 내세운다. 그 놈들이 믿는 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네.
'삶은다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귀함과 천박함 (0) | 2026.06.17 |
|---|---|
| 확률적 사고의 힘 (1) | 2026.03.13 |
| 민주주의의 위기와 기회 (1) | 2026.01.25 |
| 만족, 행복, 성취 (0) | 2026.01.22 |
| 큰 땅 안의 소인배들 (0) | 2026.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