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본꿈

단편 - 영혼

초끄네끼 2024. 8. 20. 09:27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잠깐. 조금 전에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더라?
맞다! 사슴을 쫓아 뛰고 있었는데 …

맞아! 사자가 갑자기 나를 덮쳤지.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기억이 있는데.
그런데 목덜미에 아무런 아픔도 상처도 없다.

 

지금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밝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어둠이라고 해야 하나? 발을 디디는 느낌은 나는데 내 발이 보이지 않는다. 어? 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저 멀리서 배경보다는 좀 더 밝은 존재가 보인다. 내 발도 손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 존재에게 다가갈 수 있다. 정확한 형체가 보이지는 않고 그저 존재로 느껴지지만 상대가 나와 비슷한 종류인 것은 알 수 있다.
“왜 여기 왔지?”
“나도 몰라. 너는 왜 여기 왔지?”
“사슴을 쫓다가 사자에게 잡혔어. 너는?”
“물고기를 잡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깊은 물에 빠졌는데 … 여기는 어디야?”

우리는 그저 각자의 기억이 그려주는 장면들을 마음으로 교환한다.

 

좀 더 많은 존재들이 우리를 찾아 온다. 우리는 그렇게 주위보다 좀 더 밝은 빛의 덩어리로 뭉쳐 간다.
더 많은 존재들이 보여주는 그림은 처음의 나와는 뭔가 다르다. 그들이 보여주는 기억의 그림 안에 나타나는 사냥 도구들은 내 것과는 많이 다르다. 더 날카로워 보이고 뭔가를 쏘는 듯한 도구도 보인다.

 

나중에 우리를 찾아온 이들은 처음의 우리에게 ‘말’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말을 배우고서부터는 내 기억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

 

사자에게 물려 죽어가면서 떠올렸던 내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어서 빨리 이 사자 아가리와 발톱으로부터 벗어나 집에 돌아가 아이들을 먹여야 한다는 마음. 내 집단에 속한 여자들을 다시 또 보고 싶다는 마음.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구나.
우리는 우리 각자가 떠나온 세상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나눈다.

나는 숫자도 배웠다. 우리는 개체로 보면 이미 백억을 넘었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우리에게는 개체로서의 의미는 별로 없다. 우리는 하나로 존재한다. 커다란 하나 안에서 우리는 기억을 공유한다.

 

나는 사냥꾼이었고 누구는 전사였다.
나는 여러 여자들과 살았고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누구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다.
나는 우리 집단에서 평범한 존재였고 사냥을 통해 겨우 먹고 살았지만 누구는 거대한 집단(왕국이라고 하던가?)의 우두머리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여기서는 구분이 없다. 다만 경험을 공유할 뿐이다.

 

여기에는 낮도 밤도 없다. 시간이 없다. 나중에 우리가 된 이들로부터 시간과 우주에 대해 배웠다. 밤하늘에서 보던 예쁘게 반짝이는 돌들은 별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낮의 태양과도 같은 독립된 천체임을 알았다.
시간이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 오고 누가 더 나중에 왔는지는 안다. 하지만 우리는 커다란 하나다.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살았던 세상은 지구다. 지구에서는 이미 외계 생명의 존재를 확신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궁금해한다. 우리는 커다란 하나지만 우리 모두는 똑같은 곳에서 왔음을 안다. 아직까지 지구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는 보지 못했다.

 

천문학에 일생을 바치며 오랜 수명을 누리다 온 존재가 말해준다. 최근에 외계 지적 존재의 신호를 찾았다고 한다. 빛의 속도로 가도 70년의 시간이 필요한 별의 세계로부터 지적 문명의 증거를 확실히 갖춘 전파를 탐지했단다.

 

저 멀리서 뭔가가 다가온다. 그 밝음은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가졌던 밝음과는 색깔이 다르다. 우리는 즉시 알아차린다. 70광년 너머에서 살아온 이들이다. 그들도 개별 밝음은 있지만 우리처럼 모두가 하나다.
자아가 싹트면서 최초로 이 곳에 왔던 기억처럼, 그들과 우리는 우선 기억 속 영상을 바탕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큰 하나가 된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왜 우주는 그토록 크며 왜 그토록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다음을 기대한다.


이 다음 세상은 또 어떻게 그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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